'국가’를 화두로 한 거대 담론은 오랫동안 한국 사회를 지배했다. 하지만 현재의 20대들에게 국가를 걱정하고 희생하며 투쟁의 역사를 기록하던 ‘형님 세대’의 사연은 아득한 공룡시대에 불과하다. 블로그와 미니홈피라는 개인의 왕국에 몰두해 살아가는 20대에게 과연 국가와 안보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우리에게 진보와 보수의 잣대를 들이대지 마라
20대의 안보관은 선배 세대식 이념 잣대로 판단하면 보수적으로 보일 수 있다. 최근의 북핵 사태와 대북 정책, 작통권 환수 등 안보에 대한 설문조사를 보면 60, 70대와 20대가 비슷한 대답을 제시하는 경향이 있다. 작통권 단독 행사에 대해서 20대와 50대 이상은 70%에 육박하는 ‘반대’ 의견을 내놓지만 30, 40대는 50% 이하로 낮아진다. 미군철수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20대 남성이 특히 높게 나타나 주목받았다. 전쟁이 일어나면 참전하겠다는 의견도 50대보다 20대가 더 높게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6·25가 북침이라는 인식은 20대가 가장 적게 나왔으며, 한국전쟁 발발 연도조차 가장 잘 모르는 연령대가 20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전쟁 연도를 정확히 아는 것은 30, 40대가 가장 높았다. 미국의 비도덕성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나 위협국이라는 시각도 20대에게 상대적으로 두드러진다.
기성세대의 입에서 ‘도대체 20대들은 진보야 보수야?’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기성세대에게 20대들의 의식 세계는 양극의 가치관들이 모순적으로 혼재된 모호함으로 비춰진다. 하지만 탈 이념 세대인 20대에게 진보와 보수는 의미가 없는 잣대다. 그들에게는 실익과 인터넷 네트워크로 형성된 감성적 여론이 있을 뿐이다.
극과 극의 혼재가 자연스러운 세대
현재의 20대에게 안보관은 국가와 역사에 대한 거대 담론을 통해 이뤄지고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감성의 틀에서 시시각각 이동하는 것이다. 박정희 신드롬에 다수 20대들이 동참하는 것을 보고 한 386세대는 “1970년대처럼 억압하고 희생을 강요하면 어떤 세대보다 견뎌내지 못할 것들이 그 시대를 그리워하다니…”라고 말했다. 20대는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그 어떤 역사적 사건도 직접적으로 격지 않았다. 6·25의 발발 연도를 정확히 아는 386세대의 역사인식도 없다. 반일이나 반미 감정 등 주적 개념이나 안보관도 인터넷 여론으로 형성된 군중심리에 기인하는 경향이 크다. 이 때문에 20대에게 국가에 대한 감정은 고정돼 있지 않다. 그래서 독재 시대와 동떨어진 가치관 속에 살면서 독재 시대를 그리워하고, 전쟁을 모르면서 참전을 불태우는 아이러니가 발생되기도 하지만 자유로운 사고 속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가치들을 창출해내기도 한다.
20대의 핵심 키워드는 다양성이다. 20대는 전쟁세대, 4·19세대, 386세대 등으로 지칭되던 과거 세대와 달리 한 가지 용어로 설명될 수 없다. 정치적 불안정과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개인보다 공동체가 우선시됐던 선배 세대와 달리 20대는 개인의 개성이 존중되는 환경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쟁을 겪지도 않았고 독재정권의 억압과 투쟁의 현장 또한 ‘어려서 잘 모를 때’ 지나가 버렸다. 20대는 국가 자체를 생각할 필요도 없는 환경에서 자란 셈이다. ‘이미지 세대’라는 용어처럼 그들에게 국가나 이념, 안보, 외교 등의 거대 담론은 이미지나 개인적 이익에 따라 결정된다. 월드컵 전후에는 국수주의자가 됐다가 경제불황을 체험하면서 이민을 적극 모색하기도 한다. 그래서 일괄적으로 정리될 수 없으며 그래서 기성세대의 잣대로는 모순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대학의 낭만? 도서관에서 살아요
20대를 간파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세계관은 실리주의다. 20대 가치관에 대한 설명을 위해 미국에 대한 20대의 의식을 예를 들어 보겠다. 각종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볼 때 블로그 세대와 전쟁세대는 한목소리로 한미공조의 중요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사뭇 다르다. 60, 70대의 친미는 전쟁에 대한 공포와 미국에 대한 보은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면 20대에게는 경제적 실익이 주된 이유다. 20대는 최근의 북핵 사태나 미군철수가 곧 전쟁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여파로 인한 경제적 불안감은 상당히 높다. 한 조사에 의하면 ‘작통권 환수로 인한 경제적 불안감을 느낀다’고 답한 20대가 80.8%였다. 이것은 85.1%로 나타난 50대 이상의 응답과 큰 격차 없이 높은 수치다.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북한에게 점령당한다고 생각하는 20대는 별로 없지만 20대는 전쟁 자체를 손실로 생각한다. 따라서 미군은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안보와 경제적 안정을 동시에 보장하는 존재로 인식된다. 물론 친미가 ‘남는 것’이라는 생각도 ‘그때 그때 달라요~’다. 어떤 사건으로 인터넷을 통해 감정적 여론이 형성되거나 개인적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돌변할 수 있다. 미국에 대한 인식이 이념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득실에 따르기 때문이다.
실리주의는 취업난에 허덕이는 20대의 현 주소와 관련이 깊다. 실리주의적 경향이 특히 20대 초반에 더욱 집중돼 있는 것도 취업난의 영향을 반영한다. ‘20대 안보관 방담’에 참여했던 대학 3년차 강나빌레라 씨는 “평소에 신문을 들춰보는 친구들은 거의 없다. 면접 때 물어볼까봐 취업 준비할 때서야 신문을 보는 수준이다”며, “대학의 낭만도 지식인으로서의 고민도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모두 무력화 됐다”고 한탄했다.
1980~90년대 경제적 풍요 속에서 자라나 물질주의에 익숙해진 20대는 청소년기에 IMF를 겪으면서 경제적 몰락을 충격적으로 경험한다. 이 때문에 경제적 공포심이 크고 경제적 가치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개성 있는 감각과 소비문화로 무장한 X세대가 대학에서 운동권 선배의 거대 담론을 교육받고 후배들에게는 탈권위적인 태도로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거대 담론은 더 이상 전수되지 않았다. X세대의 개인주의와 실리주의, 탈 이념과 다양성의 가치들이 과도기를 거쳐 블로그 세대에 안착됐다고 볼 수 있다.
한 20대 초반의 대학생은 “선배들은 거대 담론과 철학적 문제들을 고민하고 놀면서 대학 시절을 보낼 수 있었지만 우리는 현실적 문제를 고민하고 입시 공부만 해야 하는 불행한 세대”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 20대들은 ‘전쟁에 대한 공포도 없고 국가에 대한 개인의 희생도 없는’ 선배 세대들이 꿈꾸던 세상에 살고 있다. 안보가 취업보다 덜 중요한 세상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