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가리고 아웅’ 하는 민주당
세상에는
‘원칙’이라는 게 있다. 최근 우리 정치판을 보면 과연 원리, 원칙이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민주당의 행태를 봐도 그렇다.
민주당은 8월 10일 신당을 창당한다는 발표를 내놨다. 아예 당을 해체하고 새로 시작하느냐, 신당을 창당한 후에 합당하느냐를 두고 내부적으로
진통을 겪은 후에 후자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는 소식이다. 정몽준, 이한동, 박근혜 등을 영입해 반(反)이회창 연대하에 신당을 창당하고 나서
민주당과 합당해 외연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민주당으로서는 신당 창당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6·13지방선거와 8·8재보선의 참패는 신당창당의 직접적인 이유가
됐다. 민주당이 지금처럼 고전하는 이유는 ‘부패정권 DJ당’이라는 꼬리표가 붙었기 때문이다.
민주당 내 다수의 의원들은 상당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도 아닌데 왜 고통을 받아야 하며, 차기 국회의원 선거의
당락을 걱정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그런 한탄을 할 자격이 있을까? 당과 관련된 비리 사건이 터졌을 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나서서 바른 소리를 한 사람이
없었다. 지금 민주당의 현실은 그런 그들의 책임이 크다.
민주당은 사람으로 치자면 생사의 기로에 있다. 살기 위해서 민주당은 신당 창당을 택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다. 대체 국민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자신의 잘못이 간판을 바꿔 단다고 사라지나? 그런데도 민주당 내에서는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이에 대해 반대를
한 의원이 없었다.
평소 바른 목소리를 내 주위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해온 조순형 의원은 “당 내부의 신당 추진 논의는 국민을 속이는 무책임한 정치적 발상”이라며
쓴 소리를 했다.
그는 “민주당이 간판을 내리면 현 정부 5년의 공과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지느냐”며 “신당 추진은 책임 정치를 회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또 민주당이 이한동 총리 등을 끌어들이는 것에 대해서도 “역사적 후퇴”라고 말했다.
구구절절이 옳은 소리다. 신당 창당이라는 선택뿐 아니라 방법도 잘못됐다. 원칙도 없이 필요에 의해서 이 사람 저 사람 끌어들이는 행태는
1990년 3당 합당이나 1997년 DJP 공조와 다를 바 없다. 민주당은 자기정체성을 끝까지 고수해야 할 것이다.
조순형 의원은 “200만명의 국민이 참여한 경선에서 선출된 노 후보를 지지도 하락을 이유로 교체하자는 것은 대국민적인 명분이 없다”고도
지적했다.
민주당은 한 달 넘게 국민경선을 치르며 우여곡절 끝에 노무현 후보를 민주당의 대선후보로 선택했다. 국민경선은 김근태, 유종근, 한화갑,
김중권 의원 등이 초반에 기권했고, 막판에 가서는 이인제 의원마저 기권해 정동영 후보와 노무현 후보의 양자 대결로 마무리됐다. 이인제 의원은
보이지 않는 손이 경선판을 조종하고 있다는 이른바 음모론을 제기하며 주말연속극보다 더한 재미를 주던 경선판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그러나
끝까지 경선은 계속됐고,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닌 국민의 손이 노 후보를 선택했다.
그런 후보를 지지도가 하락했다고 교체한다는 것은 경선에 참여한 모든 국민을 기만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경선을 다시 하는 것도 그렇다.
민주당은 또 한 번 국민경선의 흥행을 기대하는 모양인데, 그 또한 국민을 기만하는 행위다. 경선이 다시 치러진다는 것만으로도 올초에 치러진
경선에 참여한 국민의 표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심을 잡고 싶다면 비전을 내놔야 한다. 또 원칙을 중시하고 꿋꿋하게 자기 길을 가는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조순형 의원의 올곧은
소리가 묻혀 버리는 민주당의 현실이 안타깝다. 이회창 후보의 병역비리 공방에 휩싸이고 있는 한나라당도 이런 교훈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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