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조아라 기자] ‘미투(me too) 캠페인’을 통해 권력형 성범죄가 자행돼왔던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나면서 아직도 우리 사회는 성범죄 고발에 따른 충격에 정신이 없는 모습이다. 하지만 피해자가 어렵게 낸 용기가 단순한 폭로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미투 캠페인이 우리 사회에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깨닫고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이 같은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사회 각계각층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지난달 26일 한국여성단체연합은 7개 지부 28개 회원단체와 함께 긴급 토론회를 열고 성폭력을 근절하고 성평등한 사회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논의의 시간을 가졌다. 이날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투 캠페인에 대해 “성폭력을 성별권력 관계의 문제, 구조적 성차별의 단면으로 봐야 한다”며 미투 사태에 대한 과제를 제시했다.
이 교수는 “피해자의 요구와 목소리는 지속적으로 중요하다”며 “착취당하고 지배당하는 사람들이 권력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정의를 요구해야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겪은 특정 고통이 사실상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발생한 부정의라는 것을 드러내고, 그 과정을 바꿀 수 있는 구체적 힘을 가진 사람이 실제 과정을 바꿔야 한다는 도덕적 요구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특정 사안의 제3자이자 동조자, 방관자인 우리는 의식적·무의식적으로 행한 자신의 가해자성을 들여다보는 계기로 삼고, 구조적 부정의의 재생산 회로를 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차별, 추행, 희롱, 폭력 등은 자신의 의도성과 상관없이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나 또는 타자에 의해 벌어질 수 있고, 본인이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거나 몰랐다고 해서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이 교수는 “구조적 과정을 보다 공정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주요 행위자인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소리 높여 비판하고, 쟁점을 조직하고, 분노를 표출하며, 연대해 정부에 변화를 위한 공적인 압력을 끊임없이 행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명숙 한국여성노동자회 노동정책국장은 “검찰 내 성추행 사건에 대한 폭로를 계기로 문화예술계, 교육계 등 다방면에서 미투 운동이 벌어지고 있으나 이전에도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 고발하는 성희롱, 성폭력 피해자들이 꾸준히 존재해 왔다”며 “이들의 용기와 목소리가 현재 거대한 울림이 돼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김 국장은 “가해자 처벌, 피해자 보호와 불이익조치 금지, 성차별적 조직문화 개선 등 관련 업무에 대한 철저한 이행으로 직장 내 성희롱을 방지하고 근절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공공 및 민간 부문 모두를 포괄하는 범정부 차원의 성희롱, 성폭력 대응체계를 마련해 체계적인 대책을 수립하고 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그는 “직장 내 성희롱 문제제기 시 가해자가 명예훼손으로 피해자를 협박하고 이를 사건 무마에 악용하고 있으므로 직장 내 성희롱 사건에 있어 ‘사실적시에 따른 명예훼손죄’를 적용하지 않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8일에는 여러 단체들이 ‘세계여성의 날’ 110주년을 맞아 미투 캠페인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정부의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전국여성노동조합은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대회’를 열고 “여성들의 생존권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수많은 성희롱, 그리고 이를 묵인하고 방조하는 남성 중심적 조직문화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며 “남성 중심적인 조직문화와 기업의 성희롱 사건 해결 시스템의 총체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YWCA연합회도 ‘3·8 여성의 날 기념 YWCA 행진’을 개최하고 여성들의 성폭력 고발에 대한 엄정 수사와 정부의 근본적인 대책 마련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정부, 어떤 대책 내놨나?
권력형 성범죄 근절에 대한 정부의 역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이어지자 정부는 12개 관계부처와 ‘직장 및 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근절대책’을 확정해 발표했다. 대책에는 △직장에서의 신고·감독 및 권리구제 강화 △문화예술계 특별 조사·신고 및 대응 체계 강화 △보건의료분야 대응 및 가해자 제재 강화 △피해자 보호 및 2차 피해 방지 △적극적 수사 대응 및 가해자 엄중 처벌 △추진 체계 강화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여성가족부는 이번 대책에 대해 “피해자들이 미투 이후 2차 피해를 받는 것을 막고, 신변보호를 위해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이고 즉각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을 강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며 “고용이나 업무관계, 사제(師弟)·도제(徒弟) 관계, 그 외 비사업장 기반의 일방적 권력관계 등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성범죄 사건에 대한 가해자 처벌을 강화해 문화예술계·보건의료계 등 민간부문 전반의 성범죄를 뿌리 뽑는 데 중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업무상 위계·위력 간음죄의 법정형을 징역 10년 이하에 벌금 5000만원 이하(현행 징역 5년 이하에 벌금 1500만원 이하)로, 추행죄는 징역 5년 이하에 벌금 3000만원 이하(현행 징역 2년 이하에 벌금 500만원 이하)로 각각 상향하는 방안이 검토된다. 법정형이 상향될 경우 공소시효 또한 업무상 위계·위력 간음죄는 현행 7년에서 10년으로, 추행죄는 현행 5년에서 7년으로 각각 연장된다.
아울러 피해자의 진술을 어렵게 할 수 있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무고죄를 이용한 가해자의 협박 등에 대한 무료법률지원을 강화하고, 피해자·신고자에 대한 체계적 신변보호 조치가 이뤄진다. 특히, 성폭력 문제가 심각하게 드러났던 문화예술계에 대해서는 특별조사단을 구성하고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신고·상담센터를 운영해 정확한 실태 파악에 나서는 것은 물론, 문화예술인의 피해방지와 구제를 위한 법률 제·개정 또한 검토할 계획이다.
보건의료분야는 올해 중에 전공의법을 개정해 수련병원의 전공의 성폭력 예방 및 대응 의무규정을 마련하고 금지 및 처분 규정 마련 등 제재를 강화한다. 또한, 전공의 대상 성범죄 사건에 대한 조직적 은폐, 2차 피해 등 부적절한 대응이 확인되면 해당 의료기관에 과태료, 의료질 평가지원금 감액 등 강력한 제재 조치를 시행한다. 직장 내 성범죄 문제는 고용노동부 홈페이지에 성희롱 익명 신고시스템을 개설·운영해 익명 신고만으로도 행정지도에 착수해 피해자 신분노출 없이 소속 사업장에 대한 예방차원의 지도 감독이 가능하도록 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