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잔치일 뿐
민주당의 김중권대표는 지난 1일 “정쟁 때문에 국회문이 닫혀 있어서는 안된다”며 연중 국회 무파행을 공동선언하자고 한나라당에 제안했다고
들린다. 이에 덧붙여 김대표는 국가보안법, 인권법, 반부패기본법 등 개혁법안을 처리 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자고 당부하면서 우리사회에 만연된
구시대적 분위기를 일소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김대표의 말은 그럴 듯 하지만 ‘알맹이는 없는 것 아니냐’ 하는 비판의 소리가 높다. 우선 국회가 파행하는 원인을 일단 야당의
책임으로 돌리고 혹은 야당만의 책임인 것으로 못을 박고 야당인 한나라당의 협조를 당부하는 것은 누가 들어도 빈 말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파행국회의 책임이 야당에는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보면 국회파행의 원천적 책임은 여당에게 있지 야당에게 있지
않다. 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 여당에게는 야당과 협조할 뜻이 전혀 없거나 좀더 심하게 말하자면 야당은 꼼짝말고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밖에는 풀이가 되지 않는다. 여야 영수회담이라 하여 얼마전에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총재가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을 적에 만일
여야의 협조와 협력이 우리가 직면한 국난을 타개함에 있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법도한 김대통령은 어찌하여 겨우 연명하기도 힘에
겨운 야당의 지도자를 향해 “내가 곤경에 빠진 것은 당신 탓이오”라는 식의 고압적 자세를 취한 것일까.
만일에 국민의 정부의 대통령이 야당 총재의 어깨를 두드리며 “야당하시기 정말 어렵지요. 나도 야당을 수십년 해봤지만 정말 어렵습니다.
대통령으로서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하여 돕겠습니다” 라고 화두를 열었다고 하면 그 영수회담이 국민의 기대를 완전히 배반한 무가치한
영수회담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집권층이 터트린 또 하나의 폭탄구여권의 안기부 예산남용- 은 동기야 어찌되었건 야당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었다. 돈을 받은
사람들의 명단마저 흘러나왔기 때문에 김기섭씨, 강삼재씨 외에도 그 명단 때문에 스스로의 정치적 앞날을 생각하면서 전전긍긍할 수 밖에 없는
야당의 정치인들이 수백명에 이르게 되었으니 정국이 불안할 수 밖에 없는 일이 아닌가. 물론 그것이 야당의 협조를 강제로 얻어내기 위한 부득이한
처방이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런 약방문으로 한국정치판의 고질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안기부예산을 가로챘다는 것은 김대통령의 자신의 말대로 “공산당 잡는 돈”을 빼내어 개인의 정치적 목적달성을 위해 낭비한 셈인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자들은 모두 사형에 처해 마땅하다고 국민은 믿고 있다. 그런 다이나마이트를 여야의 협조가 역사의 어떠한 때 보다도 시급한
이 마당에 국민이 다 보는 앞에서 여기저기에 설치하려 드는가.
상대방이 극악무도한 범죄자라 하더라도 함께 타고가던 배가 뒤집히거나 가라앉게되는 일을 해서는 안될 것 아닌가. 이미 공개된 불법자들의
명단에서 이름이 빠진 정치인들도 적지 않다는데 그런 리스트를 들고 상대방을 협박하면서 그 상대방의 협조를 어떻게 구해낼 수 있단 말인가.
명단을 공개한 것부터가 큰 잘못이다.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다고 가정해 보자. “국민 여러분 엄청난 범죄가 이미 저질러졌습니다. 용서못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하여 나는 이 명단을 내 서랍속에 넣고 잠궈 두겠습니다. 내가 대통령의
임기를 채우고 이 자리를 떠날 때 국민 여러분 앞에 그 명단을 공개하겠습니다. 쓸데없는 추측은 제발하지 마시고 끝까지 지켜봐 주시기를 당부합니다.”
대통령이 그런 담화문을 발표했더라면 국회는 파행되지 않을 것이고 여야는 협조의 방안을 모색하였을 것이다. “내가 먹은 돈은 다 깨끗하고
네가 먹은 돈은 다 더럽다”고 전제하고 상대방을 대하는 판에 민주당의 김대표의 발언이 진실한 것이라고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빈 말만
하지 말고 자세를 바로잡는 일이 선행되야 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