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이건희 회장은 큰 다짐이라도 한 듯 귀국하는 자리에서 “모든 책임은 내게 있으며, 앞으로 사회에 환원 하겠다”는 짧은 말을 하고 돌아섰다. 이 회장의 폭탄발언 이틀 후 삼성은 이례적으로 사장단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갑작스런 기자회견 발표 결정에 이순동 삼성 홍보팀장(부사장)은 “오래전부터 고심해 결단을 내린 내용이지만 최근 삼성의 사회공헌과 관련된 설들이 무성해 발표를 앞당기기로 한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사안의 중대성을 반영하듯 기자회견이 예정된 지난 7일 오전 11시 삼성그룹 본사 25층 회의실엔 삼성 출입기자단과 카메라기자들이 일찍부터 포진해 있었고, 이학수 부회장이 입장하자, 카메라 플래시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이날 기자회견장에는 이례적으로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 김인주 사장(구조조정본부 차장), 배정충 삼성생명 사장, 이상대 삼성물산 건설부문 사장, 이종왕 법무실장 겸 고문 등 그룹 사장단이 대거 배석했다.
평소 언론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내비쳐 왔던 ‘거대 기업’ 삼성도 이날만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이 부회장과 배석한 사장단은 판사 앞에 죄를 용서해 달라는 죄인마냥 자리에서 일어나 카메라를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여론 무마용’ 대책 되지 말아야
정치, 경제, 언론 등 그 어느 곳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해 왔던 삼성의 이날 기자회견은 아마도 삼성이 창립 이후로 다시없는 날로 기록되지 않을까 싶다. 이날 발표문은 세간의 예상 수위를 훨씬 뛰어넘는 ‘메가톤급’이었다. 당초 예상은 사회공헌 활동 확대를 통한 나눔 경영을 강조하는 수준 정도였다. 그러나 예상을 뒤집고 이건희 회장 일가의 사재출연과 헌법소원 취하, 구조조정본부 법무실 분리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했다.
이날 삼성은 불법 대선자금 제공, 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 배정, 안기부 X파일 파문 등에 대해 사과하면서 이른바 ‘반(반) 삼성 분위기’ 해소 대책을 발표했다. 8,000억원 규모의 사회기금 헌납, 사회공헌 확대, 공정거래법 헌법소원 및 삼성SDS 증여세 부과 취소 소송 취하, 그룹 구조 개편 등 경영권 문제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을 내놓았다.
삼성 내부에서도 1993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고 했던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 이후 가장 충격적이라는 평가다. 특히 “정치자금과 자식들에 대한 증여문제로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리게 돼 매우 죄송스럽다”는 이 회장의 사과문과 함께 발표돼 더욱 무게가 실렸다.
삼성의 발표는 주식 변칙증여와 관련한 시민단체의 요구와 지배구조에 대한 정부와 정치권의 움직임을 대부분 수용한 조치로 평가된다. 하지만 삼성의 이같은 발표를 두고 ‘반 삼성’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일시적인 제스처가 아닌가 하는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삼성은 과거 삼성자동차 사태 때에도 사과 함께 이건희 회장의 사재 출연을 발표한 적이 있으나, 지금까지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 사건은 아직도 채권단과의 법정 소송을 남겨두고 있어 이번 발표를 연결 지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계와 시민단체들은 삼성그룹이 그동안 지적돼 온 불법과 탈법, 편법에 대한 진실을 밝히지 않은 채 파격적인 대책을 발표한 것은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가 아니겠느냐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진일보한 변화이기는 하지만 지배구조 개선 등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외면하고 있다”고 밝혀 논란의 여지는 남아있다. 노동계도 ‘긍정’의 의미보다 ‘우려’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민주노총은 “삼성의 사회공헌 계획에 대한 진정성을 누구보다 믿고 싶지만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법적, 사회적 책임을 지는 것이 먼저”라며 “삼성의 발표가 수사 중인 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 증여 사건과 X파일에서 공개된 불법 대선자금에 대한 수사가 물 타기용으로 돼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한국노총 관계자도 “삼성이 많은 액수의 사회공헌 기금을 내겠다고 했지만 이것이 대선자금 등의 철저한 수사를 요구하는 여론 무마용으로 이용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부와 사전교감설 ‘모락 모락’
그러나 삼성그룹 간부들은 이번 조치를 “삼성의 철저한 자기반성으로 봐 달라”고 강조했다. “단순한 ‘反 삼성 정서 무마용’이 아니라 국민에게 사랑받는 기업으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통렬한 반성문”이라고도 했다.
한편 일각에서는 진퇴양난에 빠진 삼성그룹이 이같은 파격적인 계획을 발표한 것에 대해 삼성과 여권 간에 사전 물밑 교감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관측도 새록새록 나오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5개월간 해외에 머물던 이 회장의 갑작스런 귀국과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며 강한 의지를 내비친 것도 그렇고, 이에 맞춰 대국민 사과와 이 회장 일가의 사재 헌납 등 파격적인 계획을 발표하자, 청와대와 열린우리당 및 정부가 일제히 환영의 뜻을 밝힌 것이다.
지난해 9월 노무현 대통령은 중앙언론사 경제부장단 간담회에서 “삼성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며 직설적으로 비난했었다. 그러나 삼성의 기자회견 직후 청와대는 태도를 바꿔 “기업의 사회적 기여라는 측면에서 높이 평가받을 만한 일”이라고 극찬했다.
전병헌 열린우리당 대변인은 “한국 대표기업으로서 국민과 시민사회의 바람과 뜻을 겸ㅅ허히 수용한 결단으로 평가한다”고 말했고 한덕수 경제부총리도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이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이렇게 결정을 내린 것을 높게 평가한다”고 말했다.
당.정.청이 이처럼 한 목소리로 삼성의 결단을 환영하는 이유는 그 내용이 여권이 강조해 온 ‘대기업 역할론’이나 재벌개혁 방향과 코드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노 대통령은 경제계 인사들과의 신년 인사회에서 양극화 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했고, 여권과 삼성 간 갈등의 핵심 쟁점이었던 금산법(금융산업구조조정법) 문제에 대해서도 “법 논리만 따질 것이 아니라 국민감정도 헤아릴 것”을 주문했다. 법 논리를 내세워 이에 반대해 오던 삼성은 이날 국회와 정부의 결정을 따르겠다고 몸을 낮춘 것이다. 그러나 청와대도 삼성측도 사전교감설에 대해 부인한 것으로 알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