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정승안 교수] 여러 명의 풍수가들과의 현장답사를 하다보면 정확한 ‘혈(穴)’자리를 짚어내는 데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또 혈을 찾아내는 것이 풍수의 핵심이라는 자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비보(裨補)’의 방식으로 풍수적인 허점을 보완하려는 노력들이 꽤 오래동안 진행되어왔다는 사실은 어쩌면 상당히 모순적이라고 봐야할지도 모르겠다. 비보(裨補)의 원리 - 과유불급 강조하는 중용의 원리와 상통 흉하거나 과한 것은 누르고(壓勝), 모자라거나 부족한 것은 보완(裨補)해 준다는 풍수지리에서의 ‘비보압승(裨補壓勝)’의 논리는, 지나친 것은 오히려 부족한 것만 못하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한국인의 삶을 지배해 온 주요한 생활원리와 상통하고 있다. 이른바 중용의 논리를 갖다 붙이지 않더라도 유·불·선이 공히 공유하는 주요한 윤리적 규범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마을이나 사찰과 같은 터의 지세나 형세에서 기(氣)가 허(虛)하거나 결함이 있을 때, 인위적인 장치나 자연물로 보완하는 비보하는 방법을 써왔다. 풍수의 형국마다 맥이 약할 때는 흙을 덮어서 튼튼하게 보완하고, 때로는 ‘인위적인 산(造山)’을 만들기도 하였다. 너
[시사뉴스 정승안 교수] 포항에서의 지진과 관련하여 많은 언론들이 필로티 건축의 구조적 위험성에 주목하고 있지만, 건축전문가들은 ‘필로티 구조’가 문제가 아니라 ‘내진 성능이 없는 필로티 기둥’이 문제라고 한다. 2005년 이전에 만들어진 법에서 3층 이하 건물의 기둥은 수직 하중만 고려해 설계한 것들이 문제라는 것이다. 법 개정이후에는 내진설계가 수리적인 계산을 통한 공학적인 구조안정성이 확보되었기에 문제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물리학, 공학적인 계산의 문제에 무지한 필자로써 언급하기 어려운 점이 있지만, 위험과 재난을 겪고 나서야 개선방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뒷북치는 행태는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골짜기의 바람은 살풍(煞風), 급살(急煞)을 불러온다. 최근 들어 강원랜드에서 채용과정에서 비리가 쟁점이 되고 있다. 500여명에 이르는 신입사원들은 물론 탈락된 많은 사람들도 모두 저마다의 ‘연줄’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연줄망’의 중요성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부패타락한 자본주의의 ‘적폐’로 인식하며 ‘청산’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지고 있다. 풍수지리에서는 생기(生氣)를 얻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엄격하게는 그 기의 흐름을 탄다
[시사뉴스 정승안 교수] 새해, 무술년 2018년을 두고 60년 만에 돌아오는 ‘황금 개띠(戊戌)’의 해라며 언론과 역학자들은 열을 올린다. 좋은 띠의 의미를 찾아 출산율과 관련지으려는 언론의 기사들이 식상할 만도 하지만 매년 되풀이된다. 마찬가지로 연말연시가 되면 한 해의 운세를 예측하는 다양한 예언과 예지들, 토정비결과 한 해의 신수풀이를 위해 운명의 카운슬러들을 찾아 순례하는 통과의례들이 반복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우리가 익숙하게 마주하고 있는 사회적 풍경들이다.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은 500년 명문가들의 자존심이었다.” 우리 민족이 고대로부터 하늘을 공경하며 거행해 온 제천의식이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濊)의 무천(舞天)이었다. 고대국가의 형태가 완비되면서부터는 사직(社稷)과 종묘(宗廟)가 기준이 됐고 국가경영과 관련해 원구(圜丘)·방택(方澤)·농업(先農壇)·잠업(先蠶壇) 등의 제례들도 갖춰졌다. 이런 하늘에 대한 관념이 조상숭배로 이어져 일상생활의 원리로서의 가정의례로 제도화된 것이 제례였다.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일을 봉사(奉祀), 봉제사(奉祭祀)라고 한다. 유교적 관념에서의 조상숭배관념과 관련한 제사의례는 일반
[시사뉴스 정승안 교수] 과학만능주의와 실증주의의 유령이 한반도를 배회하고 있다. 오늘날은 물질과 과학만능주의가 중심이 되는 시대이다. 실증주의와 과학이 주도하는 시대에서는 모든 이론이나 사실들은 이른바 과학적인 방법들만이 우선적인 고려의 대상이 된다. 바야흐로 과학이라는 이름의 사회현상에 대한 연구가 한국에서는 지배적인 사조이자 유령이 됐다. 과학만능주의와 실증주의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통계의 유령들이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학계에서도 통계와 인과관계를 통한 논리적 증명이 아니고서는 주류의 논리로 진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를 위한 주요한 방법론적 논리로 활용되는 연역-귀납법은 현실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개별적 사실들에서부터 일반적 법칙을 추구하는데, 이러한 일반화에 의해서 얻어지는 일반법칙이 형성되는 과정을 경험적 일반화(Empirical Generalization)라 한다. 이렇듯 어떤 사건이나 장면들에 대한 개별적 관찰들이 경험적 일반화를 통해 정리된 것을 논리적 완결성을 지닌 과학적인 방법이며 사회현상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 오늘날 사회과학 하는 사람들의 논리적 근거이다. ○ 풍수·귀신·예언 - 과학만능주의·실증주의에 일침 가
[시사뉴스 정승안 교수]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로서의 최소한의 인문-역사-철학을 무시하는 것은 그 후세대에 대한 무지막지한 폭력이다. 천박한 물질적 가치와 승자독식의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경시되고 있는 하늘·땅·사람의 조화를 통한 세계관을 복원시켜야 한다. 공간과 사람과 사회를 대하는 일그러진 물질만능의 태도를 넘어서는 진정한 인간학에 대한 재조명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은 시대적 요청이다. 1. “정치를 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있고, 사람을 쓰는 것은 몸으로써 하고, 몸을 수양하는 것은 도(道)로써 하는 것입니다” 당대의 국정을 농단하던, 문정왕후를 ‘규중여인’이자 ‘과부’에 불과할 뿐이요. 민초는 강물이니 왕실이라 해봐야 도도한 강물에 떠있는 작은 조각배에 불과할 뿐이라는 지적으로 왕(명종)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부패타락한 관료와 무능한 왕권 그리고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일평생 처사(處士)를 자처하셨던 남명 조식(1501-1572)선생께서 명종10년에 단성에서 올린 소(疏) 내용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남명선생의 무덤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대가 끊어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현세의 물욕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오로지 경(
[시사뉴스 정승안 교수] 자연의 생겨남은 산과 물 그리고 바람의 조화에 기인한다. 우주의 변화를 음양으로 설명하면 천지의 순환으로 춘하추동의 사계절과 24절기의 변화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이를 동서남북의 네 방위에 배속하고 사이의 방위들을 합하면 팔방위(八方)가 된다. 천지인으로 나누면 24방위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 음양의 상생상극(相生相剋)과 간지(干支)를 배속하여 설명하는 것이 풍수이기론의 핵심원리다. '왕 회장'도 이루지 못했던 대학생의 꿈 “젊은 시절, 어느 학교 공사장에서 돌을 지고 나르면서 바라본 대학생들은 나에게는 한없는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작고한 현대그룹 창업자인 정주영 회장이 남긴 말이다. 정주영 회장의 최종학력은 소학교(현재의 초등학교)다. 정 회장은 막노동으로 출발해 한국 최대의 재벌이 되었지만 평생의 한(恨)이 ‘공부’였으며 자신처럼 가난으로 배우지 못해 설움을 겪는 이들에게 희망이 되고자 울산대학교를 설립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공부와 돈 버는 재주는 전혀 다른 길일까? 하늘-땅-사람의 어우러짐을 읽어내고자 하는 풍수의 세계에서는 산과 물, 바람의 작용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결과를 크게 세 가지의 뚜렷한 이념형
예로부터 우리의 조상들은 천지인(天地人) 삼재사상을 중요하게 생각해왔다. 하늘과 땅과 사람의 운명을 하나로 바라보는 관점은 동아시아 공통의 인식원리로 기능해왔다. 역(易)을 통해 만물의 변화원리에 대한 음양과 오행론적 설명이 가능하게 되면서 삼재론의 사유방식은 ‘모든 생명은 셋에서 태어난다(三生萬物)’는 논리, 원방각(圓方角), 삼수분화의 다양한 양상으로 확산되었다. 환인-환웅-왕검의 삼신사상, 연산-귀장-주역의 삼역, 가위-바위-보와 같은 생활문화에 이르기까지 삼재론은 인간의 삶과 만물 전체를 설명하는 주요한 인식원리로 자리잡았다. 그러므로 ‘위로는 하늘의 운행을 살펴보고(觀天文) 아래로는 굽어 땅을 살펴보고(達地理), 이를 미루어 사람의 일을 살펴본다(察人事)’는 논리는, 하늘의 운행원리와 흐름에 따르는 것이 진정한 인간의 길에 이를 수 있다는 동아시아문명의 핵심적인 원리로 확고히 자리잡게 된 것이다. ‘하늘·땅·사람’의 삼재론 - 한국사상의 핵심 예로부터 천문과 지리를 꿰뚫어 알아야만 제대로 된 지리를 알 수 있다고 보았기에 오늘날 천문을 모르고 풍수를 논하는 수많은 풍수논객들이, 아무리 명풍수의 반열에 있다 하더라도 반쪽이 될 수밖에 없다(물론 이런
인간의 일상과 삶은 끊임없이 오늘을 되풀이한다. 무의미하고 지루하면서도 이어지는 일상의 연속은 수많은 자잘한 사건들과 장면들과 더불어 반복되며 지속된다는 것이 삶의 본질일 것이다. 주역 계사전에서는 이를 일러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이라고 일컫는다. 천지간에 존재하는 만물과 인간 삶의 본질이 생하고 또 생하는 역(易)의 모습과 같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과 라이프니츠도 주역(周易)사상에 주목 생생(生生)이라는 말은 어느 누구도 회피할 수 없는 인간의 생로병사와 같은 삶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지만 시간과 공간조차도 서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천재적인 수학자 라이프니츠(Leibniz, 1646-1767)는 주역(周易)의 핵심코드인 음양과 생생의 논리를 기반으로 이진법을 만들었다. 아인슈타인(Einstein, 1879-1955)은 상대성이론을 통해 시간과 공간조차도 결합되어 있는 연속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오늘날 최첨단 과학과 컴퓨터문명의 논리적 기초에는 주역의 생생의 논리가 자리 잡고 있다. 전기는 17-8세기의 과학적인 발견이 아니라도 고대이래로 연구되어왔던 에너지의 원천에 대한 인류의 주된 관심사의 하나였다. 고대
꼬마신랑이 나오던 옛날 드라마에서 종종 나오던 대사들 중 하나이다. 옛날 어른들이 ‘네가 음양의 도리를 아느냐?’라는 질문 하나와 대답만으로도 그 사람 됨됨이와 공부된 정도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질문과 대답 모두가 상대적인 기준에서의 응답이었고, 절대적인 기준이나 정답은 없었다. 무슨 선문답이냐고? “네가 음양의 도리를 아느냐?” 전통적인 공간론인 풍수의 원리에서는 세상의 모든 만물을 분류함에 있어서 그 속성을 두 가지로 나눈다. 모든 만물은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서로 의존하면서도 배타적인 동전의 양면과 같은 성질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하늘과 땅’, ‘남과 여’, ‘높은 것과 낮은 것’, ‘가까운 것과 먼 것’ 들의 분류가 그것이다. 하늘이 없으면 땅이 없으므로 하늘과 땅은 서로 대립할 수 없이 상호 존립하는 조건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이른바 음양(陰陽)이라는 속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다. 음양이 사물의 속성이나 기질적인 측면에 주목해서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형상을 지니고 드러나는 실체적인 모양에 주목해서, 모든 만물의 속성을 분류하면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른바 네 가지의 사물의 형상과 속성이라는 사상(四象)이 그
오늘날 인간은 사회적 동물, 호모사피엔스적 존재로 이해되고 있다. 데카르트적인 이성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고 대립시킨다. 자연을 인간의 노동대상이자 수단적 존재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근대이후의 이러한 지배적인 인식논리들은 봉건적인 사회를 넘어서는 데는 기여했으나 현대인들에게는 오히려 이기심과 소외감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음양오행의 원리는 ‘만물의 작동원리’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존재가 만물의 속성과 더불어 하나가 됨으로써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인식논리는 동양사회에서 수천년 동안 실증되고 경험되고 공유되어 온 믿음의 체계이자 삶의 원리다. 음양오행의 원리를 중심으로 만물의 작동원리에 대한 동양사상적 대안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택지를 선택하여 집을 짓고, 방을 만들어 잠을 자는 것과 문을 만들어 바람을 소통하고, 벽을 두어 거리를 두는 것은 우주자연의 바람과 물의 원리를 생활속에서 이해하고 활용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이다. 인간의 삶이 존재하는 모든 사회적 삶의 영역에서 적용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보편적인 문화원리이자 양식이 바로 바람과 물의 원리의 풍수지리의 원리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이성
집은 영혼과 생명의 공간 근대적인 건축학에서는 집을 사람이 사는 공간이라고 정의한다. 벽과 지붕이 있는 건물, 사람이 사는 곳이 집이다. 집은 순수한 우리말이기도 하다. 집우(宇), 집주(宙)처럼 천자문에서 두 번째로 등장할 정도로 의미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집이란 무엇일까? 집은 머무르고 생활하며 일상과 삶과 일상을 이어가는 재생산의 과정, 생생(生生)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우리는 집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삶의 재생산과 같은 가족의 기능보다도 투자와 부를 증식하기 위한 투기의 수단에 더 주목하고 있는 오늘날 풍수와 같은 전통적인 사상을 되새김하게 되는 이유이다. 전통적인 건축에서 주로 활용되던 소재들은 나무와 돌, 흙이 대부분이었다. 건축의 과정도 자연과의 조화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건축기술의 발달과 소재의 변화는 너무나 다양해졌다. 철골조와 콘크리트, 스티로폼으로 무장된 건축물들의 번쩍거리는 수십층의 벽면은 외부와의 소통과 바람의 교류를 완벽하게 차단한다. 바람한 점 들어오지 못하도록 밀폐시키는 이중 삼중의 유리창은 물론 바닥재와 벽지까지 물청소를 가능하게 하였다. 생활의 편리함과 실용적인 재
풍수를 활용하여 ‘재물운’과 ‘돈복’을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풍수의 기본원리인 형상을 나누는 기준에 대해 알아 둘 필요가 있다. 풍수를 설명하는 기본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음양과 오행의 원리를 중심으로 하는 역(易)의 원리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전문적인 논의는 다른 지면에서 하더라도 여기에서 물(水)이 지니는 상징과 의미에 대해서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풍수지리에서 물(水)은 북쪽을 의미한다. 방위로는 북방(北), 현무(玄武)에 해당하고 수리적으로는 1과 6이 여기에 해당한다. 또 색깔로는 검은색에 속하고, 풍수에서는 항상 뒤쪽에서 내려오는 산줄기의 용맥(龍脈)을 현무라고 통칭한다. 그런데 여기서 물(水)=재물이라는, 돈을 상징하는 의미는 사실상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을 돈으로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명당(明堂)을 구성하는 물을 타고 바람이 모이듯이 기운이 모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물과 관련한 재물운에 대해 조금만 더 살펴보도록 하자. 풍수지리에서 ‘재물’과 ‘돈’은 득수(得水)에 달려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을 영위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기 마련이다. 최선을 다하는 방법과
풍수에서 돈에 해당하는 것도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라고 하겠지만 풍수의 세계는 ‘상대적’인 해석이 많이 나타난다. 물상과 형태들이 지닌 힘과 세력의 정도에 대한 상대적인 인식은 공간의 기(氣)적 분할 및 구조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풍수와 관련해서 ‘돈’과 ‘재물’에 해당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주택에서는 배치구조가 우선(서사택)한다. 또 현관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본다. 공간적인 측면에서는 우백호에 해당하는 우측의 산세를 중시한다. 그 중에서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한 가지를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물(水)’의 흐름과 모습이다. <편집자 주> 풍수지리에서 ‘재물’은 물(水)의 활용 여부 물이 둥글게 감싸고 돌아나가는 안쪽이 명당 풍수(風水)를 바람과 물의 원리라고 한다면, 땅위에서 바람과 물이 작동하는 원리를 밝히는 것이 풍수지리라고 할 수 있다. 시대와 역사 그리고 환경에 따라 달리 불리어지고 있지만 땅에 대한 고유한 인식의 논리나 체계는 의식주와 더불어 인간 삶에 있어서 가장 오래된 보편적인 삶의 영역이다. 고구려, 고려, 조선과 같이 오래된 수도들의 경우만 살펴보더라도 뒤쪽으로는 산이 병풍처럼 펼쳐진 지형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