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 계절 왔다, 납량 여행 떠나자!’ 올 여름은 극장가 공포물 순례를 떠나도 좋을 만큼, 공포영화 풍년이다. 공포 색채가 강한 스릴러 ‘혈의 누’ ‘남극일기’ 등이 흥행에 성공하고 있고, 본격적 더위에 때맞춰 충무로는 ‘분홍신’ ‘가발’ ‘여고괴담4’ 등을 내놓을 예정이다. 일본 영화 ‘착신아리2’에 이어 ‘토미에-리버스’가 4년 만에 국내 개봉하고 태국 영화 ‘셔터’도 서늘한 공포를 준비하고 있다.
올 여름 극장가를 비명에 휩싸이게 만들 결정적 요인은 헐리우드 공포물의 범람. ‘하우스 오브 왁스’ ‘그루지’ ‘링2’ ‘다크워터’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 등 여름 내내 행진은 계속된다. 그렇다고 미국식 공포가 유행하고 있느냐? 알다시피 오히려 그 반대다. 올해 호러의 경향에서 재미있는 점은 바로 일본식 공포의 점령이다.
헐리우드, 리메이크에 몰두
1980년대를 지배했던 호러는 ‘13일의 금요일’로 대표되는 헐리우드 슬래셔 무비였다. 당시 한국인들은 슬래셔 무비를 끔찍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무섭지 않다고 말하곤 했다. 한국인에게 무섭다는 것은 TV 공포물 ‘전설의 고향’에서 ‘내 다리 내놔’라며 쫓아오는 귀신이 주는 그 모골송연을 뜻했기 때문이다. 그때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은 ‘백인들도 처녀귀신이 무서울까?’라는 것이었다.
호기심을 해결해주는 한 TV 프로그램에서 공포는 문화적 배경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처녀귀신은 서양인에게 무서움을 주지 않는다고 했지만 어찌됐건 동양적 공포가 서양인에게도 먹힌다는 것은 사실이다. 헐리우드는 TV 브라운관을 흐느적거리며 뚫고 나오는 검은 긴 머리의 일본 귀신에 경악했다. 피 없이도 자극적인 공포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헐리우드는 일본에 러브콜을 보냈고 이렇게 해서 탄생된 미국판 ‘링’과 ‘주온’의 리메이크 작 ‘그루지’는 대박을 터뜨렸다.
원작 ‘링’의 감독 나카타 히데오가 직접 연출을 맡은 ‘링2’와 ‘검은 물 밑에서’의 미국판 ‘다크 워터’ 등은 이 같은 성공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한 마디로 미국에 재팬 호러가 대유행이다. 트렌드란 것이 하나가 성공하면 수많은 아류들로 형성되는 법이다. 공포영화는 특히 혁신적인 영화와 그 추종작으로 그룹이 만들어져 시대별로 흘러가는 경향이 강하다.
헐리우드가 소재고갈에 봉착한 것도 일본 호러 붐의 이유가 됐다. 동양 귀신이 아니라도 미국 호러는 최근 리메이크가 득세하고 있다. ‘하우스 오브 왁스’는 1950년대를 대표하는 동명의 고전 공포영화를, ‘텍사스 전기톱 연쇄 살인사건’은 ‘신화’가 된 토브 후퍼의 원작을 리메이크 한 것이 좋은 예다. 미국판 일본 공포영화가 이처럼 쏟아지게 된 배경은 이미 만들어진 작품들을 뒤지며 새로운 대안을 찾고 있는 헐리우드의 제작 상황과 일본 공포 감수성에 대한 대중의 공감이 적절하게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호러 상상력, 일본식으로 물들다
일본 호러의 한국판은 ‘링’ 정도가 전부지만 사실 충무로는 훨씬 더 일본 공포물의 영향을 지배적으로 받고 있다. 헐리우드 슬래셔 무비를 흉내내던 한국의 공포영화가 고전을 면치 못하던 중 새롭게 찾아낸 돌파구는 일본 호러였다. ‘폰’이나 ‘장화 홍련’ 등 일본 호러의 한국적 재생산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링’을 필두로 한 일본의 괴담 호러는 하나의 교본이 됐다.
공포물에 대한 기반이 없는 한국 영화에 비해 일본은 놀랄 만큼 풍요로운 공포의 본산지였다. 오죽하면 한 일본 호러 만화 마니아는 “이렇게 엽기적인 상상력이 넘치다니 일본 사람들은 원초적으로 정신병자가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말하겠는가. ‘한국의 도시괴담’과 ‘일본의 도시괴담’의 저자 김종대 씨는 “한국은 무서운 것을 표현하지 않는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무서운 그림이나 이야기들은 오래전부터 일본에서부터 유입됐다”고 말했다.
올해 선보일 ‘여고괴담4’ ‘분홍신’ ‘가발’ 등은 모두 원혼을 소재로 한 동양적 공포들이다. 이 작품들이 어떤 테크닉과 감각을 지녔느냐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만 충무로의 원혼에 대한 이미지가 이미 일본식으로 굳어졌음을 감안할 때 이들 공포물도 일본 호러의 영향권 아래 있는 작품들로 예상된다. ‘관절꺾기’ 한 번 하지 않고 칼 한 번 휘두르지 않는 연약한 한국 귀신은 현대사회에서 너무 덜 자극적인 것일까? ‘월하의 공동묘지’ 이후 ‘여고괴담’ 첫 번째 시리즈 정도가 예외라고 할 수 있을까. 일본에서 물 건너 온 변종 처녀 귀신이 충무로를 점령한 것은 이미 오래다. 비단 귀신뿐만 아니라 공포 분위기와 장치 등은 모두 일본적 호러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다.
신용불량 사회, 탐욕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올해 공포영화가 도시괴담에서 발전한 작품이 많은 것도 일본 호러의 영향이다. 특히 ‘분홍신’과 ‘가발’은 둘 다 생활 속에 밀접한 물건에게서 느끼는 공포를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TV(‘링’) 핸드폰(‘착신아리’) 디지털 카메라(‘셔터’) 등 최근 호러물이 문명의 이기를 매개체로 하는 것과 일상의 공포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안데르센의 동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분홍신’은 여자라면 누구나 탐낼만한 아름다운 분홍 구두를 소재로 한다. 이혼 뒤 무미건조한 일상에 빠져 있던 여자에게 분홍신은 욕망과 활기를 불어 넣지만 곧 참혹한 공포와 대면하게 된다. 원신연 감독의 ‘가발’은 괴담의 단골 소재인 죽은 사람의 기억이 담긴 ‘가발’이 공포의 매개체다. 언니가 항암 치료로 머리가 모두 빠져버린 여동생에게 가발을 선물한 뒤 섬뜩한 사건들이 벌어진다는 내용이다.
두 작품 모두 버려진 물건, 출처를 알 수 없는 사물에 대한 전통적인 금기를 연상시킨다. 영화는 소유욕이 불러오는 파국을 담음으로써 욕망의 위험을 경고한다. 이것은 ‘남극일기’의 공포축과도 맞물리는 주제다. 언제나 가장 비현실적일 듯 보이는 호러 장르는 가장 밀접하게 현실을 기반으로 한다.
시시각각 새로운 물건이 쏟아지고 현란한 광고들이 욕망의 대상을 눈앞에서 흔들며 유혹하는 세상, 돈 때문에 살인을 벌이고 핸드폰을 바꾸기 위해 원조교제를 일삼는 물질만능사회. 신용불량 청춘, 욕구불만의 불치병을 앓는 환자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채워도 채워도 끝없는 욕망만큼 공포스러운 것이 있을까. 올 여름 충무로가 ‘욕망의 섬뜩함’에 ‘필 꽂힌’ 것은 이 같은 집단 정서의 의식적 무의식적 반영으로 보인다.